성균관대학교 웹진

독자투고

글 : 신도현 (신문방송 16)

대학생활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사람은 꽤 모순적인 동물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이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공부와 집 이외의 생활이 적었기에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은 비슷한 두 상황이 주어졌을 때 어느 정도 일관되게 행동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상 동일한 상황에선 동일한 판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본질이 같은 두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내가 이번 학기 교양 수업을 들을때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에서 시작한다. 버스의 교통약자석과 지하철의 노약자석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학우들 중에서도 어렴풋이 모순을 느끼는 학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교수님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어렴풋이 이상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는 서울을 자주 다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박물관이나 서울의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역사 교육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프로그램을 신청해 서울의 다양한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다니곤 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가 다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어쩌면 그때부터 통학생의 운명을 타고 났는지 모르겠다.

지금이야 광역버스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지하철의 노선도 많아져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우리 집과 연결된 지하철 노선이 없었고 광역 버스는 수가 제한적이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2번 이상 갈아타면서 서울을 오가곤 했던 것 같다. 그때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재밌었다. 프로그램이 어디서 끝마치느냐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달랐다. 주로 안국역 사무실 근처에서 끝났으므로 3호선을 많이 탔다. 안국에서 양재까지 3호선을 타고 와서 버스로 갈아 타고 집으로 가는 그 길속에서 어린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사람을 주로 관찰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게 무척 실례되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초등학생 때의 나는 그저 심심해서 같은 버스, 혹은 지하철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곤 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꽤 재밌던 추억이었다. 어릴 적엔 셜록홈즈 책을 항상 끼고 다녔기에 괜히 탐정 행세를 부려보고 싶었일 수도 있다. 맞은편에 앉은 저 아저씨의 직업은 무엇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누나는 오늘 누구를 만나러 가며 저기 서 있는 저 형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셜록홈즈도 아닌 꼬맹이가 무엇을 보고 그런 상상을 했는지 참 우습기만 하다. 그래도 꼴에 탐정 흉내를 낸다고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저 아저씨는 동네에서 빵집을 하는 아저씨일거다. 저 누나는 오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며 저 형은 오늘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었을 것이다.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인데다가 직접 그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진짜로 그 상상이 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을 관찰하며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다보면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눈에 띈다. 교수님이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노약자석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지하철에선 아무리 힘들어도 노약자석에 앉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주위 사람들, 혹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는 경우는 딱 한 번, 경춘선을 통해 서울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뿐이었다. 가평과 대성리를 거쳐 가는 경춘선 지하철. 많은 대학생들이 겪어봤을 그 지하철에선 노약자석이고 뭐고 없는 것 같다. 급하면 지하철 바닥에 앉아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생각해보면 진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하철의 노약자석을 앉는 일은 거의 없다. 비교적 최근 생겨난 임산부 배려석 역시 비슷하게 인식되는 듯하다. 아직까진 노약자석에 비해 누구든지 앉는 경향이 강하지만 몇 번인가 언론에서 다뤄지고 나서 비워두는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에 반해 버스는 어떨까. 버스에도 다양한 좌석이 있다. 장애인 배려석, 임산부 배려석, 교통약자 배려석 등등. 그 이름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지하철의 노약자석과 같다. 그런데 사실 버스 안에서 약자 배려석을 비워두는 일은 거의 없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버스의 배려석이라고 일부러 그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글을 읽는 학우 중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일종의 문제의식을 느끼고 일부러 교통약자 석에 앉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통 지하철에 비해 버스 안의 교통약자 석에 대한 관심이 더 적은 것은 사실이다. 아니, 더 관대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심지어 언론도 지하철 노약자석이나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더 다루면 다뤘지 버스 내의 교통약자 석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조금 이상한 상황이다. 같은 노약자 배려석인데 교통수단이 다르다고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다니. 솔직하게 말하자. 지하철 노약자 배려석보단 버스의 배려석이 더 필요하다. 머릿속으로 지하철을 떠올려보자. 지하철은 정해진 선로와 시간대가 있다. 그 정해진 시간대에는 오직 내가 타고 있는 지하철만이 해당 선로를 빠르게 달려간다. 급회전도 없고 급감속도 없는 세상. 가만히 서 있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지하철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버스는 어떤가.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버스 안에서 단 한 번이라도 흔들려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급회전, 급정거, 그 이외에도 수많은 상황이 도로 위에선서 벌어진다. 지하철은 목적지에서 잠깐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버스는 언제 어디서든 흔들릴 수 있다. 이 갈대 같은 고체 덩어리의 흔들림은, 또 그렇기에 나름의 묘미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교통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정해진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의 시간대에는 지하철과 달리 버스 혼자만 도로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버스와 같은 노선, 혹은 일정구간 겹쳐진 노선을 지나쳐 가고 있다. 그렇기에 버스는 혼자만의 노선을 갖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요소가 개입한다. 급정거한 택시나 갑자기 끼어들은 오토바이처럼. 버스에서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본질은 같다는 점을 모두 알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 필요한 것은 오히려 버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하철의 배려석을 지키는 것처럼 버스의 배려석을 지키진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아직까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좌석 색깔의 문제일수도 있고 공간적으로 따로 분리된 지하철의 교통약자석과 그렇지 않은 버스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고민 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때에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교통약자 배려석에 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한 번 생각해봤으면 한다. 왜 우리는 버스에서 교통약자석을 지키지 않는지.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버스에서 한 번만 양보해보자. 배려와 시민의식이라는 것은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김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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